신정아 단독인터뷰 “참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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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몽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3-16 05:08 조회14,494회 댓글0건본문
“세상은 아직도 감옥”
‘옥중일기’ 펴내는 신정아 前 성곡미술관 큐레이터
신정아(40)를 만났다. 예일대 박사학위 취득상 문제로 동국대 조교수 자리와 광주비엔날레 감독직을 날린 지 4년여 만이다. 당시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사적인 관계’까지 알려지면서 신정아는 온 국민이 한꺼번에 던지는 돌을 맞고 하루아침에 만신창이가 됐다.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됐던 그녀는 2009년 4월 초, 1년반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다. 한겨울 영하 7도를 밑도는 차디찬 독방에서 꼬박 두 번의 겨울을 보낸 그녀는 “억울한 마음의 분심도, 누군가를 탓하는 원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며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계란프라이와 우유와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신정아는 무엇보다 “한순간 마음에 담았던 삿된 탐욕으로 인해 불교계 스님들과 동국대에 누를 끼친 점, 거듭 참회한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 청담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녀는 5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아팠던 과거’를 어렵사리 털어놨다.
수감생활부터 궁금했다. 그녀는 줄곧 ‘징역살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침 6시 기상, 밤 9시 취침이다. 두평 남짓한 독방은 키 168cm의 신정아가 누우면 변기통에서 문입구까지 꽉 들어찼다. 일반 재소자는 흰색, 신정아 가슴엔 수인번호 4001번 노란 딱지가 붙었다. 정치범죄 유형이라 요주의인물이어서 교도관들이 돌아가며 24시간 감시했다. 심지어 ‘일을 보는’ 시간까지 체크됐다. 식판에 밥이 나오면 비위가 약해 거의 못먹었다. 변기 옆에 달린 수도에서 나오는 찬물로 세수하고 양치하고 수의도 빨고 식기도 세척했다.
-서른 다섯 젊고 잘나가는 큐레이터의 수감생활, 어땠나.
“손빨래 한번 해본 적이 없던 내가, 독방 변기 옆에 쭈그리고 앉아 찬물에 손을 불어가면서 속옷과 수의를 빨았다. 여름은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젖어 있었다. 겨울엔 누비로 된 수의를 찬물에 담갔다가 들어올리면 너무 무거워서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였다.”
<사진설명> 지난 10일 만난 신정아 씨. 168cm의 훤칠한 키와 작고 깨끗한 동안의 얼굴은 아직 그늘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고 현실을 충만하게 살겠노라고 말했다. 사진=하정은 기자
-죽고 싶지 않았나.
“죽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내가 죽으면 담당 교도관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너무 아프고 슬프면 눈물도 안난다. 징역살이 하면서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날마다 기상시간 30분 전 미리 일어나서 주변을 정돈하고 교도관 점검을 기다렸고 불필요한 요구를 하지 않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을 자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터지는 날에는 수습이 안됐다. 아주 깊은 데서 올라오는 눈물이라 한번 터지면 밤낮없이 멈추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왜 울었나.
“구치소에 들어간 지 얼마 안돼서 교도관을 통해 들은 얘기다. 구치소에 있는 한 전경이 동국대 학생이었는데 내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며 초콜릿을 전하면서 ‘우리 교수님 잘 부탁한다’고 했다더라. 선생이라는 인간이 감옥에서 제자가 걱정하는 소리나 들어야 했으니,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신정아의 예일대 학위사건에 앞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그녀의 일생일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그녀는 우연히 갔던 삼풍백화점 1층에서 벼락처럼 덮친 돌풍으로 지하 콘크리트 더미에 꼬박 하루를 갇혀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팔이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내가 살아있는건지 죽은건지조차 분간이 안가는 와중에 스물세살 여대생 신정아는 암흑과 공포 속에서 신음했다. 생사의 경계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녀는 사고 이후 몸이 회복된 뒤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예전처럼 학업에 임하기보다 주로 여행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부적절한 방식으로 예일대 박사학위를 따려고 했나.
“삼풍사고 이후 생사의 찰나를 경험했다. 죽음을 겪고 나니까 죽기살기로 학교 강의실에서 아까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학위브로커든 가정교사든 그들에게 (예일대 학위 취득 관련) 일을 맡겨 놓고 여행을 다녔다. 잘못된 선택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쌓은 경험과 감각이 한국에 돌아와 큐레이터로서의 열정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학위를 받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무거운 짐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았는지도 모른다.”
-‘변양균 열애설’이 세상을 더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고향 청송서 중학교 때 서울로 와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갔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삼풍사고 겪고 스물일곱에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금호미술관에서 4년 성곡미술관에서 6년, 그야말로 일중독자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주말 밤낮 없이 일에만 매진했다. 사랑도 연애도 몰랐고, 관심없었다. 그 때 여러가지 인연으로 내 곁에 와서 때로는 아버지처럼 의지처가 돼 주셨던 분이다. 2008년 7월 항소심 선고 때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무슨 이유에서든 미워할 수 없는 분이지만, 어찌됐든 ‘끝이 보이는 길은 가지 말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 말씀 하나도 틀린 말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누드사진 파문의 진상은 무엇인가.
“지난 1월 조정으로 끝난 사건인데 해당 언론사를 거론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당시 미술계 사람들은 ‘합성이다’, 법조계는 ‘합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서 병원에 가서 진짜 알몸사진을 찍은 어처구니 없는 일도 겪었다. 여성마다 몸의 특정부위는 제각각이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선택한 절차다.”
-이른바 ‘신정아 사건’이 신정아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번 일의 심각성을 피부로 절감했다면 끝까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하룻밤 자고 나면 일은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채 나를 압박했다. 변호사에 이끌려 고개를 숙이라고 하면 숙이고 시키는대로 했다. 나를 조금 안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검찰조사를 받아야 했을 때, 어린 조카가 학교에서 고모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고 했을 때, 나를 두고 ‘꽃뱀’이라며 여자로서의 명예와 삶을 일시에 추락시켰을 때, 정말이지 무서웠다. 법과 재판이 나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진실을 파헤쳐 주리라 기대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징역살이를 하면서 참으로 춥고 배고팠다. 물론 나보다 더 불행한 이들도 목격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게 엉켜있는 온갖 의심과 원망과 미움의 군더더기를 떨쳐내고 물 흐르듯이 살리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나는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어긋나는 바람에 일이 잘못되면 또다시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배웠다.”
-종교는 불교인가.
“정신적인 웰빙으로서 불교를 좋아하지만 종교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어머니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불교를 많이 접했다. 동국대에서 많은 스님들을 만나면서 공부도 됐다. 아직 나는 사회문제아일 수 있다. 그런 내가 불교가 어떻다 말하는 것은 나를 포장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려스럽다. 의도와 상관없이 불교계와 마찰이 생기면서 마음 속에 짐이 많다. 일부 스님들께도 마음 속에 빚이 많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옥중일기’에는 무엇을 담았나.
“참으로 힘겨웠던 4년 세월(2007~2011)의 일기를 가감없이 실었다. 징역살이가 끝났지만 아직도 세상은 내게 감옥이다. 주변의 지인들은 다시 일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또 다수의 사람들은 뭘 잘했다고 책을 썼냐며 비웃기도 할 것이다. 책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갔던 내 마음이다. 4년에 걸친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그 시간 속에서 벌을 달게 받았다. 무엇보다 동국대와의 관계속에서 누를 끼쳐드린 스님들께 머리숙여 참회하고 싶다.”
신정아의 책은 3월10일 인쇄에 들어갔고 곧 빛을 본다. 인쇄소에 최종본을 넘기고 온 날 밤 신정아는 까닭모를 눈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무슨 생각을 했나.
“이젠 악몽에서 벗어나자. 화살은 이제 내 손을 떠났고, 세상 사람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내 목소리에 귀기울여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자 했다.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고르다가도 누군가 ‘신정아다’ 하면 들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 줄행랑을 친다. 추리닝 입고 떡볶이집도 못간다. 조조할인 영화 외에는 좋아하는 공연도 볼 수가 없다. 구치소 생활에 익숙해져 매일 아침 5시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이젠 마음속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훌훌 털면서 살고 싶다.”
경북 청송에서 택시회사와 주유소를 하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총명하고 적극적이어서 주변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으로 큰 꿈을 키웠던 신정아.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에 꽤 친근한 그녀는 “탐욕에 눈멀었던 한때 잘못에 침잠해서 생을 갉아먹기 보다는, 바닥에 떨어졌으니 바닥을 딛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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